“전능하신 하나님”
글 / 서석철 단장
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, 그 누군가를 호칭한다는 것은 그 이름을 인정한다는 의미일 텐데,
나는 아주 오래 전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. 쥐포와 오징어를 파는 차에서 스피커를 통해서 나오는
“존경하는 민주 애국 시민여러분!”이라는 호칭과 모 정당의 대표가 선거를 앞두고 떨어진 지지율을 높이기
위해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국민들을 지칭하기를 "존경하는 국민 여러분!"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. 당시에는 정말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. 그 두 경우가 국민들을 정말 그렇게 사랑하고, 존경해서 부르는 호칭이었을까?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.
하지만 그런 우스운 모습은 그건 비단 쥐포장수와 모 정당대표만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.
바로 우리, 아니 나의 모습이다.
우리는 그 분께 기도할 때 “사랑의 하나님, 좋으신 하나님, 능력의.., 전능하신...,날마다 나와 동행하시는....,”등등의 모든 좋은 호칭은 다 가져다 붙여 기도하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만, 그런데 문제는 나의 입술을 통해 고백했던 "그 전능하신 그 분의 능력"을 진실로 신뢰하느냐는 것이다.
어느 샌가 우리는 전능하신 그 분을 뒷전으로 밀어내고, 과학이나 의학 같은 현대문명에 의존하며 인간의 상식선에 머물러 있음을 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데, 진정한 호칭이란? 상대방에 대하여 그렇다고 인정할 때 비로소 그렇게 표현하게 된다.
성경에는 수많은 하나님의 호칭이 나오는데, 우리가 자주 표현하는, 그리고 믿는다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못하고, 열심히 부르지만 인간의 상식적인 선에 머물러 신뢰하지 못하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믿기 위해서는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“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”고 고백했던 것처럼 과거로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도우시고 인도하셨던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,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기억해야 할 것인데, “임마누엘의 하나님”은 우리의 생각대로,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 주시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하나님이 아니고, 기쁜 일에도 힘들 때, 고난과 병중일 때, 죽을 것 같은 고통 중일 때에도 ”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“라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.
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 주시고, 우리의 필요를 미리 친히 준비해 주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어야 할 것이다.
100세에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엄청난 요구를 하신 하나님에 대해 밤새 고민했을 아브라함의 결론은 여러 왕들의 손에서 자신을 건지신 하나님, 불가능한 가운데 기적으로 아들을 주신 하나님... 그 하나님은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는 분, 생명의 창조자이시고, 무엇보다도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, 신뢰할 수 있는 분이며, 아브라함은 자신을 시험하신 후, 죽은 아들을 도로 살려주실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고, 마침내 독생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로 결단을 한다.
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해도, 용납도 되지 않는 엄청난 요구를 해 오신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미리 준비하시고 내 인생의 모리아 산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그런 절대적인 믿음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내 것을 먼저 드릴 때 우리는 비로소 “여호와 이레”라는 기적의 사건을 베푸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. 만약 우리의 연약한 믿음 때문에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마치 웅덩이에 생명수가 가득한데 우리가 그릇을 준비하지 못해서 떠먹지 못하는 것과 같다.
우리 모두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의 삶에 늘 개입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.
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, 모사라, 전능하신 하나님이라, 영존하시는 아버지라,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(사9:6)