“진정한 용서”
글 / 서석철 단장
이 세상의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 알고 있다.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기대치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“용서하고, 사랑해야 한다”라고 알고 있는 것 같은데, 평신도에 대한 기대치가 그 정도라면 목회자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클 것이다. 어쩌면 그래서 목사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.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그 누가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하더라도 그 상대방에게 예수님과 같이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.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늘 고민에 빠져서 산다. 많은 장애인들과 부딪히며 일상을 보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잘못과 실수의 연속이 이어지는 일이 빈번한데, 그런 잘못을 한 상대방에게 용서와 이해 대신 질책과 추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면, “나는 사랑이 없는 목사인가? 아니 내가 목사 맞나?”라는 생각에 어느 때는 자격이 없는 목사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혼란에 빠져 살기를 반복한다.
요즘 방송되는 드라마들을 통해서 천주교의 신부라는 직분이 뜨겁게 부각되고 있다. 그 중에 “열혈**”라는 드라마에서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악을 향하여 혈기를 부리며 사고를 치는 다혈질 신부의 이야기가 나오는데, 그런 다혈질의 신부를 향해 상대역을 맡은 한 형사가 이렇게 질문을 한다.
“원래 신부는 세상을 사랑하고,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본분이 아닌가요?” 그러자 그 신부는 이렇게 대답한다.
“어설픈 용서는 그 자체가 악이고, 악을 만드는 근원이거든 그래서 나는 함부로 용서 같은 건 안 해~”
그 장면을 보고 듣는 순간 나는 ‘그 말이 맞다’는 생각에 마음 속 한켠에 자리 잡고 있던 답답함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. 정말 그랬다. 우리 인간은 그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인데,
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우리가 예수님인 것 같은 늘 착각을 하며 살아간다. 그리고 예수님 같은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함에 좌절하기도 한다. 물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필수 조건이다.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기에 늘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다.
진정한 용서와 사랑은 어떤 잘못이나 실수를 무조건적으로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, 그 잘못을 인정할 때까지 정확하게 지적해 주고, 그 이후로 다시는 그 잘못에 대해 재론(再論)하지 않는 것이다.
창세기 18장에는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이가 생길 것이라는 여호와의 예언을 문밖에서 듣고 속으로 웃으면서 “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”라는 사라의 말에 여호와께서 왜 웃느냐?라고 질책하자, 두려웠던 사라는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지만 여호와께서 다시 명확하게 “아니다 네가 웃었다”라고 재차 지적하시는데, 만약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사랑하지 않으셨다면, 그리고 거짓말을 한 사라를 용서하지 않으셨다면, 어쩌면 우리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, 성경의 인물 중 이삭의 존재는 없었을 것이고, 여호와 이레라는 기적의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. 주위의 사람들을 의식해서 가식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어설픈 용서보다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함량미달인 모습으로 비쳐질지라도 하나님께서 창세기 18장을 통해서 보여주신 또 따른 사랑과 용서의 표현 방법을 보이는 것은 어떨지 모르겠다.
잘못이나 실수를 한 상대방에게 잘못을 끝까지 지적하되, 다시는 그 잘못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.
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(창18:15)